1. 1000년의 침묵을 깬 단 하루
1812년 8월 22일 아침, 한 스위스 청년이 좁고 깊은 사암 협곡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의 옆에는 짧은 칼을 찬 베두인 안내자가 단 한 명 있었을 뿐이었다. 그가 보고자 한 것은 베두인들이 “파라오의 보물”이라 부르던 사막 한가운데의 잃어버린 도시였다. 그날 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사암 절벽이 아니었다. 1000년 가까이 서구의 기록에서 사라졌던 고대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가, 그날 다시 세계와 연결되었다.

2. 나바테아 왕국이라는 사라진 무역 제국
페트라를 세운 나바테아인은 본래 아라비아 반도 북부의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4세기경 지금의 요르단 남부 사암 협곡 지대에 정착했고, 아라비아의 향료와 시리아의 직물, 이집트의 곡물을 잇는 카라반 무역의 중심을 장악했다. 전성기였던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페트라에는 약 3만 명이 거주했다고 추정된다. 도시의 사암 절벽에는 수백 개의 무덤과 신전, 그리고 약 8500명을 수용하는 야외 극장까지 깎여 있었다. 나바테아인의 진정한 천재성은 건축이 아니라 물 관리에 있었다. 그들은 사막에 흩어진 작은 샘과 빗물을 수십 킬로미터의 수로와 저수조로 연결해 3만 명의 도시 생활을 유지했다.
3. 두 차례의 결정타와 사라진 도시
페트라의 쇠퇴는 두 차례의 결정적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106년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로 직접 편입한 일이었다. 로마는 무역로의 일부를 북쪽의 팔미라로 이동시켰고, 페트라의 카라반 수입은 점차 줄어들었다. 두 번째 결정타는 363년의 거대한 지진이었다. 이 지진으로 페트라의 정교한 수로 절반이 무너졌고, 도시의 인구 부양 능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비잔틴 시대 잠시 부활했으나 7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 다시 쇠퇴했고, 12세기 십자군이 인근에 작은 요새를 세웠다는 기록을 끝으로 페트라는 서구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4. 부르크하르트라는 이름의 스위스 청년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는 1784년 스위스 바젤에서 부유한 상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라이프치히와 괴팅겐에서 동방학을 공부했고, 1806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영국 아프리카 협회에 자신을 소개했다. 협회의 의뢰는 한 가지였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는 경로를 개척하라는 것이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임무를 위해 먼저 동방의 언어와 문화를 완벽히 습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1809년 시리아 알레포에 도착했고, 이후 약 2년 동안 아랍어와 이슬람 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자신을 “이브라힘 이븐 압달라”라는 인도 출신의 무슬림 학자로 소개하기 시작했고, 현지인들조차 그의 위장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했다.
5. 베두인 사이를 떠도는 한 가지 소문
1812년 여름, 부르크하르트는 다마스쿠스를 출발해 카이로로 향하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사해 남쪽의 험준한 산악 지역을 통과하던 중, 베두인 부족들이 “와디 무사”라고 부르는 한 계곡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게 되었다. 그곳에는 “파라오의 보물이 숨겨진 잃어버린 도시”가 있다는 것이었다. 부르크하르트는 동방학자로서 이 이야기에 즉시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신이 읽은 고대 문헌 속에서 사라진 나바테아의 수도가 바로 그 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을 떠올렸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6. 아론의 무덤이라는 영리한 핑계
문제는 그 계곡이 외부인에게 절대로 열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베두인 부족들은 외지인이 들어와 보물을 가져갈까 두려워했고, 무장하지 않은 학자라도 절대로 안내해 주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는 한 가지 영리한 핑계를 만들어냈다. 페트라 인근의 호르 산 정상에는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졌다. 그는 그곳에 양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종교적 서원을 명분으로 베두인 안내자를 고용했다. 안내자는 처음에는 부르크하르트를 의심했지만, 그가 코란 구절을 유창하게 암송하고 이슬람 율법에 대한 깊은 지식을 보이자 마침내 길을 안내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절대 조건이 있었다. 도시 안에서는 절대로 멈춰서지 말 것, 노트도 꺼내지 말 것.

7. 시크 협곡, 1.2킬로미터의 좁은 통로
8월 22일 아침, 부르크하르트와 안내자는 와디 무사 마을 외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부터 페트라의 입구까지는 시크라고 부르는 좁은 자연 협곡이 이어졌다. 시크의 길이는 약 1.2킬로미터, 폭은 좁은 곳에서 단 3미터에 불과했고, 양쪽 절벽은 80미터 높이로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협곡 안은 한낮에도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려 있었고, 머리 위로 보이는 하늘은 한 줄의 가느다란 띠처럼 좁았다. 협곡 바닥에는 약 2000년 전 나바테아인들이 깎아 만든 정교한 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부르크하르트는 협곡 안의 음향이 너무 깊어서 자신의 발자국 소리조차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점점 더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일기에 적었다.
8. 알 카즈네, 협곡 끝의 충격
시크 협곡이 마지막 굽이를 돌고 가장 좁아지는 구간에서, 갑자기 양쪽 절벽 사이로 거대한 정면이 햇빛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약 40미터, 폭 약 25미터의 그 신전은 단단한 사암 절벽을 통째로 깎아 만든 한 덩어리의 건축물이었다. 정면에는 그리스 코린트 양식의 거대한 기둥이 두 층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에는 정교한 조각의 페디먼트와 약 4미터 높이의 항아리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베두인들은 이 항아리 안에 파라오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믿어, 오랫동안 총을 쏘아 그 안의 보물을 떨어뜨리려 시도해 왔다. 항아리 표면에는 수많은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곳이 바로 베두인이 “알 카즈네”, 즉 “보물의 집”이라 부르던 곳이었다. 학자들은 이 건축물이 기원전 1세기경 나바테아 왕의 무덤이었다고 추정한다.

9. 노트를 꺼내지 못한 한 사람의 기억
알 카즈네를 지나자 시크 협곡이 끝나고 거대한 분지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절벽을 깎아 만든 수백 개의 무덤과 신전, 그리고 거대한 야외 극장이 있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안내자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노트를 꺼낼 수 없었다. 그는 도시 전체의 구조와 주요 건물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기억해야 했다. 그는 외투 안쪽에서 작은 종이 한 장과 연필 끝부분만 꺼내, 안내자가 한눈을 판 짧은 순간마다 짧은 메모를 휘갈겨 적었다. 그날 밤 캠프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이 곳이야말로 사라진 페트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단 하루만 머문 후 안내자의 재촉으로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 단 하루의 기억이 페트라를 다시 세계 지도 위에 올려놓게 된다.

10. 32세의 이른 죽음과 사후 출판된 일기
부르크하르트는 카이로로 돌아간 후 자신의 발견을 즉시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신중한 학자였고, 자신의 추론이 정확한지 다시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는 카이로에서 다음 탐험을 준비하던 중 1817년 10월, 갑작스러운 이질로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단 32세였다. 그가 영국 아프리카 협회에 보낸 일기와 보고서는 그의 사망 후인 1822년에 “시리아와 성지 여행기”라는 제목으로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 한 권이 1000년 가까이 잊혀졌던 페트라의 위치를 세계에 알렸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학자들과 화가들이 차례로 페트라를 찾아 그림과 도면을 남겼고, 19세기 후반에는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다.

11. 오늘까지도 80퍼센트 이상이 모래 아래에 잠긴 도시
페트라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오늘날 연간 약 100만 명이 방문하는 요르단의 대표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발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학자들은 페트라 도시 전체의 약 15퍼센트만 발굴되었다고 추정한다. 나머지 약 85퍼센트는 여전히 모래와 토사 아래에 그대로 묻혀 있다. 2016년 미국 신시내티 대학의 사라 파르카크 교수팀은 위성 영상 분석을 통해 알 카즈네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거대 구조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길이 약 56미터, 폭 약 49미터의 거대한 기단으로, 정확한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부르크하르트가 처음 본 그 도시는 여전히 비밀의 상당 부분을 모래 속에 감추고 있다.

12. 한 명의 위장 학자가 남긴 유산
부르크하르트의 발견은 단순히 한 도시를 다시 찾아낸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한 명의 유럽인 학자가 동방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그 사회의 일원처럼 위장한 채 사라진 문명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방법론은 이후 19세기 후반의 동방 탐험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의 동방학자 리처드 버튼이 1853년 무슬림 순례자로 위장해 메카에 들어간 일, 헝가리의 아르미니우스 밤베리가 1863년 수피 데르비시로 위장해 중앙아시아를 횡단한 일은 모두 부르크하르트가 만들어낸 전통의 연장이었다. 32세에 카이로의 한 방에서 외롭게 죽은 한 스위스 청년이 시작한 일은, 19세기 동방학의 한 시대를 만들어낸 셈이다.

13. 마치며: 협곡 끝에서 그가 본 것
1812년 8월의 그 오후, 좁은 시크 협곡의 끝에서 부르크하르트가 본 것은 단순한 사암 건축물이 아니었다. 1000년 가까이 사막의 침묵 속에 잠겨 있던 한 문명이 다시 세계와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노트를 꺼내지 못한 그 순간의 떨림, 안내자의 의심을 피해 가며 머릿속으로 도시 전체를 기억해야 했던 그 긴장감을, 우리는 그가 남긴 책 속의 단 몇 줄로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발견은 사진 한 장보다도 한 명의 기억이 더 큰 진실을 남기기도 한다. 시크 협곡을 통과한 그 단 한 명의 학자가 없었다면, 페트라는 어쩌면 100년쯤 더 모래 속에 묻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잃어버린 도시는 그렇게 한 사람의 호기심과 위장과 떨림에 의해 다시 깨어난다.